애 둘 유부남의 홀로 제주도 자전거 여행기

프리퀄

올해 초에 와이프에게 통보했습니다.

"9년간 애들 키우느라 힘들었으니 올해는 각자 놀자!"

콧방귀를 뀌는 와이프를 처제가 가는 8박 10일 해외 여행에 짐짝처럼 끼워넣어서 보내버렸습니다. 40도를 찍었던 불지옥 같은 이번 여름에 아들 둘과 부대끼느라 영혼은 탈탈 털렸지만 제주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만은 행복했습니다. 매우 시무룩하게 귀국한 와이프의 첫마디.

"귀국날이 가까워 질수록 우울해졌어"

드디어 내 차례가 왔습니다. 하늘이 도우는 건지 비행기 표도 황금 시간대에 척척 잡히고 준비도 착착 진행됐습니다.

준비

- 자전거 : 1일 대여 1.5만원*5일간 = 총 7.5만원
- 숙소 : 안잡음.
- 맛집 : 안찾음. 단 아끼지 않기
- 관광지 : 유명 관광지는 다 가봤으니 패스

자전거는 제 자전거 비행기 싣고가봐야 포장비가 왕복 2만원*2이니, 고장나거나 펑크났을때 찾아와준다는 현지에서 빌리는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현지 자전거샵을 찾아서 입문급 로드 빌렸더니 사장님이 남는 카본로드가 있다고 툭...
<4박5일 정들었던 카본로드>
숙소는 제주 게스트 하우스 검색해봤더니...어마어마하게 많더군요? 비루한 유부남 허벅지에 어디까지 갈지도 모르겠고 그냥 가서 당일 예약해도 되겠더군요. 어차피 2박부터는 제주 친구집에서 지낼거라 신경도 안썼구요.

맛집 찾기보다는 규칙을 세웠습니다.
- 음식점에서 비싼 메뉴 사먹기
- 까페에서 비싼 음료 사먹기
음식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 그 집에서 비싼 메인 메뉴를 시켜먹죠. 그러니 맛있을수밖에! 그것도 모르고 맛집이라고 찾아가서 기본 메뉴 시켜먹었으니 별반 차이가 안났을겁니다. 이번엔 홀가분하게 혼자가니 부담도 없겠다 무조건 비싼 거 시켜먹기로 했습니다. (결과는 성공)

준비물

가져간거 : 헬멧, 장갑, 양말4, 속옷4, 티셔츠3, 긴바지, 반바지, 바람막이, 고글, 충전기, 보조배터리, 안경닦이
가져갔지만 안쓴거 : 랜턴
안가져간거 : 썬크림
필요했던거 : 국토종주수첩, 자전거행복나눔 앱 설치

첫날

대망의 첫날 새벽에 부시럭부시럭 준비하고 있었더니 첫째아들이 일어나서 화장실 가면서

"아빠 잘 다녀오세요~"

감동...이 녀석이 벌써 이만큼 커서 아빠한테 잘 다녀오라고 인사도 하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떠난다!

용두암 인증센터 -> 다락쉼터 21km

오전 9시 드디어 제주 공항 도착! 하자마자 자전거샵 사장님의 픽업으로 샵에 가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처음 타본 카본로드는 느낌이 좋네요. 비가 부슬부슬 오길래 편의점에 가서 우비와 삼다수, 초코바를 사고 출발했습니다.
<용두암 인증센터와 자전거>
바다로 내려가서 파란 선 따라서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 제주 환상 자전거길이라는 샵 사장님의 조언에 따라 파란선을 찾았습니다. 곧바로 용두암에 도착했더니 닥터후를 연상케하는 빨간 인증센터 박스에 도장이 있습니다. 근데 난 인증서가 없잖아? 당황. 두리번 둘러보니 관광센터가 있네요. 가서 달라고 하니 인증서를 주는데 수첩은 다 떨어졌답니다. 아..수첩? 검색해보니 여권모양으로 된 수첩이 있고 거기에 붙이는 거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http://www.bike.go.kr/cert/27) 대충 접어서 가방에 쑤셔넣고 출발!
<비행기에서 보이던 빨간 트로이목마 등대>
체력 안배를 위해 천천히 가겠다는 생각도 어느새 훌훌 날라가버리고 신나게 밟습니다. 바다가 변화무쌍하니 정말 지루하지 않고 마침 비오느라 구름도 잔뜩 껴서 햇빛이 없으니 힘도 들지 않습니다.
<고기국수 곱배기>
너무 순식간에 다락 쉼터에 도착했습니다. 선명하게 보이는 빨간 박스에서 인증하고 배를 채우려 천천히 지나가다가 드디어 고기 국수집을 발견했네요. 곱배기로 시켜서 말그대로 후루룩 마셔버렸습니다. 캬 기본적으로 맛있는데다 자전거 타서 배고프니 쭉쭉 들어가네요.

다락쉼터 -> 해거름마을공원 21km

<한라봉 ??? (까먹음)>
이번 여행에서는 커피는 캔커피마시고 브랜드 아닌 까페에 가서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음료수만 사먹겠다고 생각하고 마신 첫 음료수입니다. 저 한라봉 음료수는 이번 제주여행 최고의 수확이었어요! 말린 한라봉을 잘게 썰어서 넣은 것 같은데 씹을때마다 쫄깃쫄깃하면서 진한 과즙이 나오는데, 정말 맛있더군요.
<협재해수욕장 파노라마>
당시 태풍의 간접 영향권이라서 그런지 파도가 꽤 거칠었습니다. 바다에 들어갈것도 아니고 좋네요. 정말 좋습니다.
이번에도 정신없이 바다 구경하며 오다보니 어느새 인증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인증하고 인증사진 찍고 조금 쉬면서 다음 목적지를 확인했습니다. 이번엔 송악산 인증센터까지 35km 네요. 조금 긴장했지만 어차피 무계획이라 가서 먹고 쉬고 하면 되죠. 태풍이라 사람이 없으니 게스트하우스 잡는것도 쉬울거라 예상했습니다.

해거름마을공원 -> 송악산 35km


영상에는 안잡혔는데 날개가 지나갈때마다 거대한 웅웅 소리가 나더군요.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는데 영상을 찍었는데 안들려서 안보냈습니다. 다음에 오면 꼭 들려줘야지... 자전거 타면서 드는 생각의 대부분이 그런식이었습니다. 우와 멋지다~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다~ 10년을 결혼생활했으니 나의 모든 삶이 가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홀로 여행에서도 가족 생각만 하는구나.. 아무리 좋은 풍경이라도 계속 보니 좀 지루했는지 상념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뭐 그것도 좋죠.
<차귀도, 누운섬 파노라마>
사진으로 담아보니 눈으로 보는 풍경의 반도 제대로 못잡는것 같습니다.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앞에 바다가 있다보니 협재와는 다르게 바다가 잔잔합니다. 낚시하는 분도 좀 있구요. 차귀도 앞바다에는 잠수함도 있네요.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이름 모를 공원에서 찍은 바다입니다. 파도가 거칠게 올라오는데 멋지더군요.
송악간 즈음에 슬슬 허벅지가 올라옵니다. 체력 안배 안하고 신나게 달렸더니 벌써 올라오네요. 체력보충하러 가장 먼저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백반 먹었더니 돔베고기와 생선이 나오는데, 첫 느낌은 오..백반도 잘 나오네? 하지만 역시 백반집이라 맛이 특별한 없더군요.멀리서부터 보이는 봉긋 솟은 송악산은 정말 이질적입니다. 하지만 사진이 한장도 없습니다. 정말 지치긴 했나봅니다.
정리하다보니 송악산 인증 도장이 없어서 이상하다 싶어서 보니 사진도 없네요? 뭐지...싶어서 찾아봤더니 안갔습니다. 그냥 지나쳤네요 하하..아.... 정신머리하고는.... 괜찮아요 다음에 또 갈거니까요.

송악산 -> 화순금모래해변 게스트하우스 10km

이때 시간이 4시반쯤. 슬슬 해도 내려가는게 보이고 숙소를 잡아야겠습니다. 대충 지도보고 여기 해변 좋아보이네라며 일단 가봅니다. 1층 맥주집 주인에게 물어서 입구도 이상한 숙소에 들어갔더니 알바가 맞아주네요. 예약도 안하고 온 손님에 당황하는 듯 하지만 안내해줘서 도미토리에 자리 잡고 샤워합니다.
그리고 정리하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무지개 끝자락에 이끌려 밖을 나갔더니....
<초거대 무지개>
동쪽 하늘에 하늘의 반을 가르는 초거대 무지개가 눈에 들어옵니다.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고 서있다가 후다닥 파노라마를 찍었지만, 정말 표현이 안되네요. 끝에서 끝까지 보이는 이런 무지개는 영화에서나 볼법한 장관입니다. 5분만에 사라지네요. 아쉬.....
<산방산 노을>
울까봐 준비했어. 뒤돌아보니 서쪽 하늘에 새빨간 노을입니다. 장엄한 광경 두개를 연타로 맞았더니 너무 감동입니다. 이 두 사진을 위해서(사실은 나중에 하나 더) 블로그를 포스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주 사는 지인이 풋... 하며 하늘을 가르는 거대 "쌍무지개"를 보여줬습니다. ㅋㅋㅋ 대체 이 동네는 뭐야...)

게스트하우스

처음이지만 평범한 게하라는 건 알겠네요. 깨끗하지고 관리된 티는 나지만 방음도 안되고 민감한 사람들에겐 힘들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뒷통수에서 베게 닿으면 5초컷 수면이니 문제 없죠.
사장님이 저녁에 포트락 파티 한답니다. 포트락 파티가 뭐지??? 눈치 빠른 사장님이 만원만 주면 자기가 먹을건 준비해줄테니 자기 먹을 술 정도만 준비해오랍니다. 파티에는 숙박객들이 왔는데 저와 비슷한 아재 둘과 서핑족들이 왔네요? 게스트하우스가 서핑족들의 아지트랍니다. 서핑족들은 다들 이렇게 멋지고 아름답습니까? 아재 위축되네요. 하하호호 웃고 즐기고 새로운 세계도 알아가며 밤은 깊어가고... 새벽에 출발해야하니 적당히 정리하고 먼저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게하 사진도 없습니다. 정말 아쉽네요. 포트락 파티 사진 좀 찍어둘껄...


둘째날

게하에서 친구집까지 인증센터 두개가 있고 도합 70km 가량 됩니다. 오늘의 목표입니다.
<어서와 강풍은 처음이지?>

게스트하우스 -> 법환바당 20km

진짜! 레알! 너무! 힘들어요! 오르막에 맞바람 치면 헬스장에서 자전거 최고단수 올려놓고 밟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중문쪽은 지대가 높아서 오르막이 많습니다. 허벅지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신선들이 산다는(?) 한라산>
사진만 봐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람이 분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인데 전 오른쪽으로 갑니다. 하.하.하. 1일차와 달리 맑은 날씨에 한라산 경치도 끝내주지만 눈에 안들어옵니다.
일단 중문에 도착해서 아침 밥을 시켰더니...
<성게국밥...성게???>
1.5만원이 이정도 퀄리티라니 너무 맛있네요. 맛집인지 가족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근데 요리 이름은 좀 달리 하셔야 할듯 합니다. 물론 성게가 들어있긴 하지만 비주얼이 어디가 성게국밥?
아이들을 데려온 아빠들의 부러운 눈빛을 뒤로 하고 또 달립니다. 지나가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중문 해수욕장은 정말 거친 태평양 바다 느낌이네요. 너무 멋집니다. 겨우 20km인데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법환바당에 도착했습니다.
<천혜향 에이드>
인증샷 찍고 두리번거리니 까페가 하나 있어서 이번엔 천혜향 음료수를 시켜봤더니, 천혜향을 그대로 갈아서 주네요. 맛이 신선했습니다. 법환바당 바다는 정말 좋습니다.

법환바당 -> 쇠소깍 14km

사진은 없지만 여기서 "이걸 자전거로 내려가라고?" 싶은 내리막이 하나 있습니다. 꼭 자전거에서 내리시기 바랍니다. 묘기 자전거나 다운힐 자전거 타시는 분은 Ok


남쪽 해안을 따라 엄청난 맞바람을 뚫고 가다보니 얼굴에 바닷물이 쏴아 날려서 정신 차려 보니 위와 같은 풍경이 보이네요. 이 높은 지대에 바닷물이 날릴 정도로 바람이 엄청 납니다. 영상에 보시다시피 파도 윗부분이 바람에 날려버립니다. 거기도 무슨 이름이 있던데 기억은 안나고 영상에 보이는 방파제가 하효항입니다.
너무 바람에 세서 그런지 쇠소깍 관광 보트도 운행 안하더군요.

쇠소깍 -> 표선해변 28km

과정이 생략된듯 기억에 없네요.. 엄청난 바람을 뚫고 도착한 표선해변이라 성취감은 좋았습니다. 다만 해물짬뽕을 실패해서 기분이 안좋았습니다. ㅋ

친구집

드디어 도착한 친구집. 태풍이 지나간 후 날씨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2박 3일간 술에 쩔어......낚시도 하고 맛집도 가고 멍때리고 힐링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맑은 날 친구집 옥상과 친구만의 관측 포인트에서 보았던 쏟아지는 별과 은하수는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었습니다.
<이름모를 해변에서 본 성산일출봉>

<바움 시그내쳐 커피>

<섭지코지에서 아이스크림>

마지막날

표션해변->성산일출봉 22km

친구집에서 공항까지 대략 75km 가량인데 아침 6시에 출발하면 오후2시 비행기 타는데 무난하겠더군요. 그래서 마지막날도 친구집에서 자고 새벽에 출발했습니다.
<일출>
말이 필요한가요? 일출 그 자체입니다. 무한 감동을 느끼며 열심히 페달질을 했습니다.

성산일출봉->김녕성세기해변 29km

친구가 해녀의 집은 조합 운영이기때문에 보장된다며 해녀의 집마다 특별 메뉴가 다르니 한번씩 가보라고 하더군요. 다음에는 해녀의 집 투어 해볼까 합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어제 먹은 술이 채 깨지도 않아 오조 해녀의 집에서 전복죽으로 해장했습니다. 비싼감이 없지 않지만 탱글탱글하니 맛있더군요.
<오조해녀의 집 전복죽>
성산일출봉을 기준으로 북쪽으로 가면서 갑자기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다음에는 이쪽에서 카약이든 스노클링이든 해녀체험이든 꼭 바다 체험을 해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또 열심히 페달질을 합니다.

김녕성세기해변 -> 함덕서우봉해변 9km

남국의 바다같은 김녕 해변이야 뭐 유명하죠. 바로 앞에서 백가지 향을 내는 백향과라는 열대과일 에이드를 팔길래 마셔봤습니다. 독특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습니다. 저는....다시 먹을 것 같진 않네요.
<김녕 백향과 에이드>
김녕과 함덕은 느낌이 비슷합니다. 남국의 바다같은 느낌이요. 다만 함덕은 많이 개발된 느낌이라 김녕이 제 취향에 더 맞네요. 기회가 되면 애들 데리고 김녕에 한달살이(혹은 1년살이) 해보고 싶습니다.

함덕서우봉해변 -> 용두암 25km


<종주 완료>
드디어 완성! (사실은 송악산 안찍음..) 정말 뿌듯하네요. 이 기쁨을 다음에는 아들과 함께 이루고 싶습니다.
제주시에 다가와서는 마을 사이에도 길을 이어 놓은것 보면 자전거길 만든 공무원의 의도가 보입니다. 공무원스럽기는...
<제주항 크루즈>
제주항에 다가오면서 거대한 크루즈가 보입니다. 어마어마한 크기로 위세를 뽐내며 정박해있습니다. 나중에 나이 들면 크루즈 한번 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르막이 이어지며 이 길 맞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사라봉에 도착해서 절벽에서 제주항을 내려다봅니다. 우와 좋군요. 사진 찍은 것 같은데 없네요. 시간이 부족해서 정신이 없었나봅니다.
그렇게 제주 시내를 관통해서 자전거샾에 도착했고 맛집이라고 소개받은 우진해장국에서 허둥지둥 점심을 먹고 샵 사장님이 제주 공항까지 태워다 주셨습니다.

여행 끝

자전거로 다니면 차로 다니면서 볼수 없는 제주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다만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한라산은 이미 올랐고 다음에는 오름도 올라야죠. 위에 이야기했듯이 바다 체험도 해야죠. 지나가다 본 텐트 야영 자전거 여행도 해야죠. 아직 제주에 할게 너무 많습니다.
역시 날씨가 좋아야합니다. 그런데 더위, 미세먼지, 태풍, 폭우 이정도만 피하면 될 것 같습니다. (뭐야 다 피해야하잖아)
머리아프게 계획할 필요없이 무계획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가도 좋습니다. 말도 다 통하고 위험하지도 않고 곳곳에 편의점이며 맛집이며 숙박이며 다 있습니다. 맛집 고집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합니다.
제주 자전거 여행 두번 가세요! 세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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